
신중함
나는 선천적으로 착하고 순한 성격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외모 역시 특출나지 않았다. "선하게 생겼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키가 크거나 눈에 띄는 신체적 매력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다. 내가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그 답의 시작이 다름 아닌 '배려'라는 걸 조금씩 깨달아가던 시기였다.
학생이었던 나는, 좋아하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할 것 같은 일이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려고 애썼다. '모든 것'이라고 해봐야 학생 신분에 가진 건 몸뚱이 하나뿐이었지만, 마음을 담은 행동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가진 것도, 연애에 있어 특출난 재주도, 능력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무턱대고 고백부터 하기보다, 내 진심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먼저 생각했다. 어디에서든 섣부른 행동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적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성급하게 움직였다가 내 감정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차분히 시간을 두고 세심하게 상대를 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마음가짐이 바로 배려의 시작이었다.
좋아한다는 표현 대신, 나는 친구 같은 편안함으로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러운 내 행동은 어쩌면 소심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담스럽지 않게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게 내 목표였다. 성급하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해 곁에도 있지 못하느니, 차라리 친구라는 테두리 안에서 곁을 지키며 편안함을 주고 싶었다. 동시에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이성적인 끌림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내 스타일을 하나씩 바꿔가며 대입해 보는, 지금 생각하면 다소 무모한 시도를 시작해 봤다.
계획
계획은 이랬다. 함, 무뚝뚝함, 부드러움 등 따라 해볼 수 있는 행동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유심히 관찰한 뒤, 그 아이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마치 연기하듯 하루는 이렇게, 하루는 저렇게 행동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떤 모습일 때 더 관심을 보이는지 실험해 본 결과, 이 과정은 내가 처음 가지고 있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상대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성들에게 각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알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 시절 내가 좋아하던 아이에겐 학창 시절을 함께한 여섯 명의 친구가 있었다. 대부분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다녔고, 그럴 때마다 다른 과였던 나는 하교 시간을 어떻게든 맞춰 기다렸다가 그 무리에 합류하곤 했다. 그런 환경은 내가 계획한 모습들을 시험해 보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였다.
학교가 끝난 후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저곳 들르던 그 아이와 친구들. 분식집이나 공원, 모닝글로리 같은 큰 문구점과 책방들은 내게 더없이 좋은 실험 장소였고,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루는 '강함'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물론 능숙한 배우처럼 자연스럽게 해내진 못할 걸 알고 있었기에, 짧고 영 있는 동작 하나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계속 기다렸다.
그날은 그 아이가 자주 가던 KFC에서 간단히 시켜 먹으며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나는 '함이란 어떤 모습일까?'를 머릿속으로 계속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앞에 놓인 쟁반 위 치킨 포장지와 종이 받침을 부드럽게 쓸어 모아 구겨 쥔 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내 행동에 무심함을 담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던져 넣었다. 그 작은 동작 하나가 그날만큼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이렇게 사소하고 별것 아닐 것 같은 행동 하나하나에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조금씩 녹여내면서, 어설프게나마 나에게 어울리는 모습과 반전 매력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새롭게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